고부응(중앙대) 교수가 초민족 시대의 민족 정체성 : 식민주의 · 탈식민 이론 · 민족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0월)를 출간했다. 아래 미디어 서평을 참조하세요.
[ 미디어 리뷰 ] '람보'를 어떤 시각으로 볼까
모든 서사에는 작가가 일차적으로 상정한 독자층이 있기 마련이다. 비근한 예로, 영화 ‘람보’가 상정한 관객은 월남전에서 패배한 기억을 상상적 차원에서라도 보상받고 싶어 하는 미국시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관람하다가 백인영웅과 동일시하게 된 한국인 관객은 정신적 위무를 필요로 하는 미국인의 자리에 아무 생각없이 자신을 세운 것은 아닌지. 이와 유사한 반성이 외국문학과 관련하여 「탈식민주의 연구」라는 이름 아래에 이뤄지고 있다. 탈식민적 연구는 서구의 문학작품을 「그들」이 아닌 「우리」의 입장에서 새롭게 읽음으로써 「그들」의 진실에 맞서 「우리」가 본 진실을 밝히는 작업으로 구성된다.
『초민족시대의 민족정체성』은 이런 「저항적 독법」을 정교한 형태로 보여주는 비평서이다. 이 책은 대학 강의실과 가정에서 아낌을 받아왔던 영문학의 정전을 식민주의라는 정치적·역사적 맥락 내에 위치시켜 읽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비서구의 시각으로 서구의 담론을 대할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모험심에 가득 찬 우리의 청소년기를 풍요롭게 해 준 세계 걸작 「로빈슨 크루소」가 있다. 그러나 백인 주인공의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읽을 때 이 「세계 명작」은 새로운 의미를 띤다. 즉, 크루소는 「노동」이나 「자급자족」 등의 가치를 구현하는 위대한 모험가라기보다는, 총과 화약 같은 기술문명의 「힘」을 앞세워 영국적인 가치와 질서를 해외에 이식한 식민주의자로, 또는 원주민 프라이데이에게 토착문화를 죄악시하고 백인문화를 숭배하도록 가르침으로써 그의 정신세계에 자기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백인 우월주의자로 다가온다. 탈식민주의 연구의 가치는 비서구권의 독자에게 서구 중심주의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크루소의 시각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프라이데이가 될 것을 종용하는 데에 있다.
탈식민주의에 대하여 근자에 제기된 비판은 국내 탈식민 연구자들 역시 또다른 「학문의 수입상」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탈식민주의 이론은 제3세계 반(反)식민운동가에 의해 정립됐지만, 동시에 80년대 이후 서구 문화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낸 제3세계 출신의 이민자로부터도 나온 것이 사실이다. 서구에서 발원한 이론을 국내에 수입하여 쓰는 것은 곧 서구를 비판하는 「도구」조차 서구에 의존하는 것이며, 이는 곧 「자아비판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서구 시나리오에 놀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 전반부를 서구의 대표적 탈식민주의 이론가에 대해 비판하는 데 할애함으로써 이런 우려에 대하여 답하고 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국가체제가 주도하는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보여준다. 서구와의 관계에서 한국은 제3세계적 속성을 가지는 반면, 동남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와의 관계에선 제국주의적 속성을 띠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저자는 차별받아온 외국인 노동자와 여성, 장애인, 노인 등 주변화된 집단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우리 사회에도 「내부 식민주의」가 존재함을 지적하며 영화 「서편제」와 「꽃잎」 등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새로운 민족정체성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 책은 논의를 영문학에 국한시키지 아니하고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로 확장시킴으로써, 국내 탈식민주의 연구의 지평을 넓힌다. 또한 문학에서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보편적 가치를 찾기를 기대하는 독자나 경직된 민족주의적 정서로 서구문화를 배척하는 비평가 모두에게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도전으로 다가온다.
--- 조선일보 책마을 이석구 (연세대 교수·영문학) (2002년 11월 9일 토요일)
|